작은 마을에서 사는 이야기 6.


시골살이 손익계산서


가끔 낯선 방문객들에게 시골에서 어떻게 먹고 사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한 달 생활비가 얼마냐는 질문을 듣기도 한다. 보통 ‘연봉이 얼마에요? 얼마짜리 집에 사세요?’ 라는 질문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을 텐데, 우리에게는 너무 쉽게 던지는 이런 질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를 벌어서 얼마를 쓴다고 말해야 할지 곤란하다. 


우리 부부는 주로 낮 시간에는 마을에 있는 작은 단체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농사를 짓는다. 일 년에 한번 벼를 추수하면 직거래로 쌀을 판다. 가족들이 먹기엔 양이 넉넉한 감자, 고구마, 들기름, 땅콩을 가끔 팔기도 한다. 우리 부부의 일터는 이 마을의 대부분 단체가 그러하듯이 근근이 망하지 않게 꾸려가며, 하고 싶은 일들을 같이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매달 고정 급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시노동자들의 봉급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이다. 


불규칙한 농산물 판매 수익 뿐 아니라, 계산하기 곤란한 항목들이 꽤 있다. 아침마다 걸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남편이 직접 배웅할 수 있다. 함께 걸어서 말이다. (특별한 여행을 가지 않아도) 날마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동료들과 함께 가꾼 농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고 쉴 수 있는 터전이 된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돈을 내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 만화방, 마을 정원, 책방이 있다. 누가 기르고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앞 선 어른들의 노력으로 만든 동네 어린이집과 학교에 아이들을 맘 편히 보낼 수 있다. 생태육아,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없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원이 마을에서는 수없이 오가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불특정 다수를 위한 무의미한 서비스나 소비재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품이 있다. 누군가는 더 많이 누리고, 누군가는 품을 더 많이 내기도 한다. 어떨 때는 받기만 하고, 어떨 때는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도 있다. 때로는 마이너스가 되고 때로는 플러스가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누리며 사는 것이 참 많다. 나는 얼마를 벌며, 얼마를 쓰며 산다고 대답해야 할지 여전히 답을 못 찾았다. 아래 글은 이 마을에 이사 왔던 첫 해, 처음으로 했던 아르바이트 이야기이다. 상황은 꽤 많이 바뀌었지만, 돈벌이에 대한 생각은 큰 변화가 없어 덧붙인다.

 


매미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눈앞에 호오~랑나비가 펄럭이며 날아다니고 창 밖으로 흔들리는 꽃들이 보인다. 고개를 쑥 빼고 조금 멀리 보면, 초록의 논.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의 녹색 산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난 지금 돈벌이 중이다. 팥빙수 알바. 작은가게 빵집(풀무학교생협 우리밀빵가게)에서는 빵이 잘 팔리지 않는 여름에 팥빙수를 판다. 나의 임무는 주말 오후에 5시간 동안 가게를 지키며 팥빙수를 만들어 파는 것이다. 


그릇에 우유를 조금 넣고 얼음을 갈아 그릇에 넘치도록 가득 담는다. 그리고 설탕에 절인 유기농 딸기, 이 동네에서 나온 곡식으로 손수 만든 미숫가루, 국내산 팥을 직접 끓여 만든 팥앙금을 적당히, 취향을 알고 있다면 취향대로 넣어준다. 모양은 소박해도 맛은 꽉 찼다. 서울에서 판다면 적어도 팔천원, 만원은 받아야 할 텐데 여기선 그냥 삼천원이다. 공장에서 만들어 나온 젤리, 떡, 팥앙금, 시럽이 없어도. 아니 없어서! 정말 맛있고 건강한 팥빙수이다.


문제는 거의 손님이 안 온다는 것. 슬프다. 너무 더워서 다들 집에만 있거나, 아니면 계곡이나 바다로 놀러 갔나보다. 순간 사람이 그립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조용하다. 고요하다. 한편 즐겁기도 하다. 온통 자연에 둘러싸여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즐겁다.


이렇게 사람을 그리워하며, 팥빙수를 만들며 다섯 시간을 보내고 만원을 받는다. 만원?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잘 모르겠다. 단지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대신 시간과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풍성하게 살자던 나의 재무 계획이 착착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먹는 사람도 건강에 보탬이 되고, 팥빙수를 팔아서 번 돈은 학교 생협을 통해 지역을 위해 사용된다. 한 그릇을 팔든 두 그릇을 팔든, 부끄럼 없고 떳떳한 장사이니 정말 좋다. 앞으로도 딱 요렇게만 돈벌이하고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즐거운 돈벌이’ 2008년 8월 10일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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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친구들>


얼마 전, 친구 부부가 작은 가게를 열었다. 직접 구운 카스테라 한 접시에 담담하게 내린 커피 한잔, 우유 한잔.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메뉴다. 하루 장사를 끝내고 다시 빵반죽을 하고 내일 팔 카스테라를 굽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카스테라처럼 보드라워졌다. 날마다 걸레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빵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뜰을 가꾸는 친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이 40세. 그렇다. 불혹(不惑), 미혹되지 않는 나이, 마흔이 되었다. 물론 나는 공자가 아니니, 하루에도 수십 번 혹한다. 혹하기도 하고,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 칭찬 한 마디에 혹 하기도 하고, 여덟 살 아이가 던진 ‘엄마, 싫어.’ 한마디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30년 가까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책을 읽는 ‘할머니 독서모임’이 있다. 불혹의 나이에 모이기 시작하셨는데, 이제는 할머니들이 되셨다. 


첫 모임은 1985년 어느 목요일에 있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무려 30년 동안 두어 번 정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쉬었을 뿐이다. 한때 스무 명에 이르렀던 회원이 지금은 다섯으로 고정되었다. 가끔씩 마을에 새로 온 젊은 처자들 한둘이 소문을 듣고 드나드는 정도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처럼 마르지 않는 이 한결같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일까? 홍 사모님이 살짝 웃으면서 말한다.

“사실 쭉정이들만 남은 거예요. 똑똑한 이들은 바빠서 모두 제 일들 하러 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공부할 겸 매주 나와서 책을 읽은 거예요. 머리가 좋아서 정리해서 발표하지는 못하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게 그저 좋았습니다.” 

(2015년 7월 14일 한국일보 '불혹에 만나 칠순 훌쩍… 책 덕분에 평생 벗으로 살죠.' 기사 중에서)


할머니들은 열 권짜리 우찌무라간조 전집을 다 읽으셨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다 읽고 하동으로 역사기행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시골 작은 식당에서 밥을 하시거나,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모여서 책을 읽어 오신 할머니들이다. 스스로를 쭉정이라고 말하시지만, 그 자리를 30년 동안 지켜 온 알곡 중에 알곡이다. 


지난 해, 도서관에서 ‘우리마을 사람책, 그녀들의 홍동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마을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을에서 40년간 미용실을 해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용사 할머니는 첫아이를 낳으러 시댁에 내려왔다가, 마을에 눌러 앉게 되고 결혼 전에 했던 미용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40년 동안 자신에게 머리를 맡겨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오래 미용실을 할 줄은 당신께서도 모르셨다며. 


그들이 70살까지 책을 읽자, 40년 이상 미용실을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날 미용실에 온 손님의 머리를 정성껏 말아드리고 이번 주에 같이 읽기로 한 책을 계속해서 읽었을 것이다. 때로는 날이 궂고 서로 감정이 상해도 약속을 지키고 그 자리를 지킨 하루하루가 모여서 30년이 되고, 40년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라져가는 토종씨앗을 모으고 그 씨앗을 평생 심고 기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청년이 있다. 철을 따라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고 다시 씨앗을 갈무리한다.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고 안정된 월급을 받을 수도 없지만 날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뿐만 아니라, 어디든 불러 주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만드는 친구, 날마다 같은 시간에 직장으로 출근하는 친구, 매년 텃밭일지를 만들고 꼼꼼히 농사기록을 채워 나가는 친구… 


마흔이 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흔한 자격증 하나 없고 여전히 어떻게 살지, 뭐 하고 살지 고민 많은 나를 보면 답답하다. 하지만 일상의 자리를 지키며 매일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볼 때 마음이 놓인다.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겨울 밭은 고요하다. 언뜻 보면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고요한 밭에서 겨울을 보낸 밀, 보리, 양파, 마늘은 봄이 되면 튼튼하게 자란다. 그 자리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요한 겨울 밭이 없이는 열매도 없다. 씨를 품고 추위도 바람도 햇볕도 담담히 겪어내는 겨울 밭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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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살아가는 어머님>


시골의 겨울은 길다. 우리 가족은 종종 대중목욕탕에 간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좀 더 자주 가게 된다. 남편은 아들과 단둘이 남탕으로, 나는 딸아이와 시어머님과 함께 여탕으로 간다. 결혼 초기에는 시어머니와 목욕탕에 가는 게 민망했지만, 이제 며느리 11년차이자 목욕탕 친구로 10년 지기가 되니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뜨거운 물에 마음껏 몸을 담그고 때를 밀고 따뜻한 목욕탕에서 시원한 우유 한 팩 먹으면, 스르륵 눈 녹듯 편안한 몸과 마음이 된다.  


8살 딸과 나, 그리고 일흔 다섯 시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때를 민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적이 없을 이태리타월로 박박 민다. 딸아이는 때를 살살 밀고, 비누거품을 대야 가득 만들고, 빈 우유팩을 가지고 와서 놀기도 한다. 각자 때를 밀고 나면, 서로 등을 밀어주는데 지난해부터는 딸아이가 내 등을 밀어주려고 한다. 작고 야무진 손으로 구석구석 밀어 준다. 딸아이가 밀어주는 것은 1차이고, 2차로 어머님께서 내 등을 밀어주신다. 같은 때밀이 수건인데도 엄니께서는 항상 살갗이 발갛게 되도록 세게 밀어주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으윽! 좀만 살살’ 이라는 말을 매번 한다. 물론 엄니께서 밀어주시면 엄청 시원했다. 아주 깔끔해진 느낌. 


얼마 전, 바쁘다는 핑계로 몇 달 만에 목욕탕에 갔다. 어머님이 등을 밀어주시는 게 참을 만 했다. 아니, 좀 덜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좀 더 밀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끝났다. 그 순간,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님도 늙으시는구나. 손힘이 약해지신 게 확실히 느껴졌다. 


우리가 시골로 귀촌을 한다고 했을 때, 시어머님은 우셨다. 농사일이 뭔지도 모르는 아들이 시골에 가서 농사짓겠다고 하니, 어머님은 속상해 하셨다. 늦둥이 아들이 17살 되던 해, 쉰 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되셨다. 그 이후로 간병일을 하면서 남 도움을 받지 않고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셨다. 어렵게 기른 그 아들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손주도 낳았다. 이제 아들 며느리가 맞벌이하면서 자그마한 아파트 하나 장만하고 어머님은 손주 봐주면서 ‘평범하게’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아무리 귀농을 반대해도 듣지 않는 아들 며느리 앞에서 어머님은 엉엉 우셨다. 


결국 눈이 펑펑 오던 날, 우리는 낯선 시골로 이사 왔다. 그 해 여름, 어머님도 결국 같은 마을로 귀촌을 하셨다. 가까이 사시며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려 오셨다. 남편이 마을에 있는 작은 생태농업학교에 입학하여 유기농업을 배우고, 나는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시골집을 구하신 어머님은 그 해 여름부터 바로 농사를 지으셨다. 몇 년간 경작하지 않아 풀이 무성했던 밭에 풀을 뽑고, 땅콩을 심고 녹두를 심고 상추를 심으셨다. 가을에는 배추 고구마 무를 심어 먹었다. 산골 출신이 어머님은 산에 가서 산나물과 버섯을 캐 오셨다. 겨울에는 안방에서 콩나물을 길러 국을 끓이셨다. 도토리를 주어서 도토리묵을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어머님의 바람대로 아들 며느리 손주들을 철마다 맛있는 먹거리로 잘 돌봐주셨다. 


어느새 열 번째 새해를 이 마을에서 맞이했다. 어머님은 마을에서 우리보다도 더 많은 이웃들과 더 가깝게 더 다양하게 만나셨다. 로컬푸드직매장에서 반찬을 만들어 파는 ‘할머니장터’에서 7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돌아가며 반찬을 만드신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출근을 하신다. 어머님은 다시마 튀각과 고추부각을 잘 만드신다. 농사일이 거의 없는 겨울에는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보신다. 평전과 같이 실제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좋아하신다. 몇 년 전에는 겨우내 두꺼운 ‘간디 평전’을 다 읽으시고는 “간디 선생님은 예수님 같이 훌륭한 분이구나. 이렇게 훌륭한 분을 나이 일흔이 넘어서야 알게 되다니 원통하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줄줄이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 문턱도 못 가보셨다. 하지만 농사일 다음으로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신다. 3년 전에는 마을 할머니들과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쓰는 ‘임상역사’ 수업에 함께 하셨다. 70여년의 인생을 스스로 어떻게 적으셨을까 무척 궁금한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비밀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마을에서 함께 만든 협동조합병원 ‘의료생협’이 주최하는 허리 근육 운동모임에 참여하신다. 


아이들이 마을에서 자라듯, 어머님도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늙어 가시니 다행이다. 어머님이 마을 안에서 소소한 일거리와 모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어머님의 노년을 아들 며느리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은 마을 도서관에서, 몇 시간은 의료생협에서, 몇 시간은 하늘 아래 밭에서, 몇 시간은 동료들과 함께 하는 반찬 가게에서 지내실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새해에는 마을에서 친구들과 ‘좀 더 천천히’ 늙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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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2017.03.08 01:52

< 우리 집 > 


이제 곧 다섯 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다. 우리가족은 6년 전 늦가을, 이 집으로 이사 왔다. 포대기에 업고 이사 왔던 둘째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밭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동네 어르신이 소개해 준 집이다. 이전에 살던 집이 크고 깨끗했지만 전세가 비싸고, 둘레에서 밭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개받은 이 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오래된 집이었지만, 집에 딸린 텃밭이 무척 아름다웠다. 손이 부지런하고 눈이 고우시던 할머니는 밭 둘레에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두셨다. 이 집에서 살던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가꾸시던 나무와 꽃은 남아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봄에는 수선화를 시작으로 매화와 앵두꽃이 폈고 가시오가피 순과 두릅 순은 봄을 알리는 반찬이 되어 주었다. 밭에는 봄마다 달래, 냉이가 쑥쑥 올라왔다. 여름에는 풋대추를 따먹고 보리수 열매를 거두어 술을 담그고 잼을 만들어 먹었다. 가을에는 앞뜰 뒤뜰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 늦가을에는 은행나무 열매 냄새와 모과 열매 향기가 묘하게 섞였다. 밭에서 우리가 기르고 가꾼 것보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나무와 꽃, 열매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가만히 방에 누워있으면 뒤뜰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창문을 열면 청설모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웃풍이 심한 옛날 집이라 겨울에는 거실에 나무난로를 두고 불을 지폈다. 겨울 내 짬짬이 나무를 자르고 쪼개는 것이 남편의 일이었다. 난로에 불이 잘 붙지 않으면 온 집안이 오소리 굴처럼 연기가 가득했고 눈이 매워서 방으로 피신했다. 난로에 불이 잘 붙은 날에는 난로 속 발간 불빛만 보고 있어도 참 따뜻했다. 감나무 옆에는 닭장을 지어서 닭을 키우고 토끼를 키웠다. 며칠 집을 비우는 날에는 동네 친구들이 들러서 토끼풀, 닭풀을 뜯어주고 갔다. 도시에서만 자랐던 내가 암탉 소리와 수탉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농사짓고 청소년들과 수업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서 하루 3끼 밥을 차렸던 시간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내게는 너무 버거워서 울고 화내고,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날들도 많았다. 오래되고 낮은 집이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습했다. 장마철에는 옷장에 넣어둔 옷에도 곰팡이가 생겼다. 습하고 더운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긴 여름 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늦게 집에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시골집이라 여기저기 쥐가 구멍을 뚫고, 천장에서는 쥐들이 뛰어다녔다. 거실에서 쥐와 마주치고 까무러치기도 했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게 이런 것이겠지. 이집에서 지냈던 6년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면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맛있는 기억이 많아서 다행이다. 


지난 봄, 새로운 집터를 마련하고 여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쥐가 뚫지 못하게 튼튼하게, 바람이 새어 들지 않는 따뜻한 집을 지었다. 건축은 동네 목수 친구들이 맡아주었다. 모자란 돈은 담보 없이 ‘도토리회(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모은 협동기금을 이용하여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협동조합형 마을은행)’에서 빌렸다. 집터도 친구가 땅을 저렴하게 내주어 마련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의 삶이 항상 그래왔듯이, 집을 짓는 과정도 동네 친구들, 형님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가난하고 행복하게, 소박하고 아름답게’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표어를 내걸고 결혼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학교 소강당을 빌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하고 싶었지만 실상 나는 가난하지 않았고 가난이 뭔지도 몰랐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난하게 살겠다는 목표가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사를 앞둔 내 마음에는 부끄러움이 있다. 가난하게 살겠다고 했는데, 으리으리한 새집으로 이사라니. 이젠 가난한 척하기도 틀렸다.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이사일 수도 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볕이 잘 드는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가난하게, 혹은 아름답게 살겠다는 목표는 버렸다. 그저 열린 집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을이 우리 가족에게 큰 품을 내어주었듯이, 우리 집이 누군가에게 열린 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 가는 집, 피곤한 친구들에게 낮잠을 선물하는 집, 시원한 맥주 한잔에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는 집. 이 정도 바람은 가지고 살아도 되겠지. 이제 농사지을 땅도, 평생 맘 놓고 살 집도, 어디 도망 못 가게 나를 잡아줄 빚도 생겼으니. 그 정도 바람은 가져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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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든 잘 노는 아이들 >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아이들은 어디서든 놀았다. 여름에는 줄기가 땅으로 축 쳐져 아늑한 공간을 만드는 공작단풍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풀무일요집회에 참석하는 명분으로 풀무학교에 가면 학교의 숲과 산을 몇 시간이든 쏘다녔다. 새 깃털을 발견하면 머리에 꽂고 산딸나무 열매를 귀걸이처럼 걸어 장식하기도 했다. 나뭇가지는 깃발이 되었다가 배를 젓는 노가 되었다가 장군의 막대기가 되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물을 받아 놓고 첨벙대며 놀았고, 겨울에는 비료포대에 볏짚을 가득 넣어 푹신한 썰매를 만들고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왔다. 큰 느티나무에 오르기도 했고, 작은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기도 했다. 


 마을 도서관 앞마당도 어린이집 뒤 텃밭도 빵집 정원도 헌책방 앞 느티나무에서도 아이들은 놀았다. 조용히 모래와 물만으로 몇 시간씩 놀기도 했고, 도서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발로 참방거리기도 했다. 놀이에 푹 빠져드는 순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웠던 몰입의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어린 시절 신나게 놀아본 경험이 없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빨리 철이 들어버린 나에게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곤 ‘아무도 없는 옥상 지붕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뿐 이다. 그것마저도 위험한 곳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엄청 얻어맞고 마무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친구도 없었고 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용히 하늘을 보았던 그 순간은, 나에겐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난 주 어린이집에서 여울이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이집에서 월요일 마다 주말 지낸 이야기로 그림일기를 쓰는데, 몇 달에 한 번씩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있었다. ‘엄마, 아빠, 오빠, 내가 집에서 뒹굴뒹굴 거렸다.’라는 짧은 글과 함께 온가족이 뒹굴 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단조로운 글과 그림이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온 가족이 별 일하지 않고, 일정도 없이 빈둥거리는 순간이 아이에게 좋은 느낌을 남았던 것 같다. 


 신나게 놀았던 시간만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몰입의 순간, 다함께 숨죽여 아기토끼를 품에 안아본 순간, 별일 없이 온가족이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나누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네에서 청소년우선공간으로 만화방을 만들 때, 몇 가지 그림을 그렸다. 

 ‘멍 때리고 있어도 잔소리가 없는 공간,

 청소년들이 서로 만나고 연결되는 광장 같은 공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거들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


 이런 모습의 청소년 공간을 만드는데, 동네 이웃들이 후원금을 모아주었다. ‘자녀들이 만화방을 이용할거니까. 가끔 만화방에 가고 싶으니깐. 나도 만화책을 좋아하니깐. 동네에 만화방 하나있으면 좋을 것 같으니. 다 떠나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만화방을 하고 싶다고 하니 얼마라도 보탠다.’라는 다양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10만원도 내고 5만원도 보탰다. 적은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동네 친구들이 함께 해서 공사비를 마련했다. 누군가에게는 놀이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일터가 되는 공간, 비록 망하더라도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공간이다. 마을에 하나 뿐인 맥주집도, 헌책방도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어졌다. 


 어느새 만화방이 생긴 지 두해가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청소년 친구들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보드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고 때로는 곤히 낮잠을 잤다. 만화방이 있으니, 만화방에서 쉬고 놀고 뭔가 작당을 시작할 수 있었다. 놀이가 있고 친구가 있는 마을에 살수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해도 삶은 고단하고 고민 많고 곧잘 지루하기 마련이니, 우리는 자주 놀면서 멍 때리면서 때때로 졸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지난 가을, 아이들이 어둑해질 때까지 집 앞 밭에서 놀았다. 아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나뭇가지와 꽃으로 장식한 무덤 두개가 남아 있었다. 올 여름 장마에 죽은 아기토끼를 묻은 자리다. 아이들이 그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우리가 함께 사는 삶터이며 일터이다.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두고 어린 새끼가 태어나는 자리이자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미 죽은 것, 이미 자리를 떠난 것, 이제 더 이상 함께 놀 수 없는 것들에게도 자리를 내어주는 아이들의 모습은 내게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추억, 특히 부모님과 함께한 추억들은 미래에 숭고하고도 강렬한, 유익하고도 아주 건전한 기억이 될 겁니다.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어른들은 여러분의 교육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지만, 유년 시절에 간직했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 중에 단 하나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되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또한 아름다운 이 추억이 우리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겁니다.’ -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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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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