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이 쓴 <신을 옹호하다_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를 읽고.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이었지 필요가 아니다. ...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 사실의 증거다. (19)

아이들은 태어날 때의 이야기나,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한다. 이것은 내 삶의 근본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이고, 이유 없이 주어진 내 삶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찾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고등교육을 마친 나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적인 개념으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세포분열이 일어나면서 장기가 생겨나고 결국 인간이 생겼단다’ 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서 서로 몸과 마음을 맘껏 사랑하면서 아기가 만들어졌지. 라고 설명해주는 것이 어쩌면 더 사실에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한 명의 아기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엄마, 아빠가 사랑으로 몸을 합쳤다는 증거일 뿐, 한 명의 사람이 필요해서 그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랑을 하고, 섹스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도킨스는 근본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직설적 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의 토양이 되는 불안감과 굴욕감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인데도 말이다. (91)

서울에서 4년간 일했던 직장, 기독교 구호단체가 떠오른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편인 것처럼 광고하고 후원금을 모으지만 실상은 과연 가난한 사람들의 편인지 의심스러웠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조차 없으면서, 아프간전쟁 이후나 이라크 전쟁 후에 재건에 뛰어 들 때 그들의 논리는 참 허접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천박한 자본주의 그 자체이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듯, 스스로를 숭고한 존재로 드러내는 추악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삶과 죽음은 끝내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회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38)

믿음이란 본디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을 뜻하는데, …. 내가 이해하는 바의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 어둠과 고통과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55)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을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는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 나는..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109)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 이유는 저자 테리 이글턴이 적나라하게 기독교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이야기해주는데,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도 관념적으로는 너무나도 완벽하지만, 실제 인간은 악하고 모순되었기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잣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능숙하지만, 삶으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독교를, 예수를 붙들고 있다. 예수를 내려놓지 못한다.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지금시간’이라는 한 순간이라도 예수를 쫓아 살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찰라 같은 ‘지금시간’이라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메시지를 실현해보려는 마음. 그리고 사랑을 이유로 나를 창조한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의 존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125) 진보는 가장 노골적이고 기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즉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야 하고, 고문도 없어야 하며, 아우슈비츠도 없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보라는 개념은 거짓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126)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상당 부분 겹쳐진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 이상’의 것이지 ‘사회주의에조차 못 미치는’ 어떤 게 아니다. (김규항 – 226)


(2013-03-30 / 최수영/ 좋은과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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