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기억

 그 날은 말이야. 아주 밝은 날이었어. 화창한 날이었고, 아마도 봄과 여름 사이였을 거야. 눈부시게 반짝이던 햇살이 또렷이 기억나거든.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밝지만은 않지. 친구야, 갑자기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냥 너에겐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야. 너는 나에게 가벼운 공감의 말을 건네거나, 억지스레 편드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래. 바로 그 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가 단짝으로 날마다 붙어 다녔던, 심지어 화장실도 손잡고 같이 가던 열두 살, 그 시절의 이야기야. 체육이 있었던 날이었을까. 그날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었지. 촌스러운 초록색 티셔츠와 남색 반바지의 그 체육복 기억나지. 너랑 삼거리슈퍼 앞에서 인사를 하고 집으로 왔어. 우리는 꼭 삼거리슈퍼 앞에서 헤어졌어. 가끔은 삼거리슈퍼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가끔은 너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지만, 우리집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지. 언젠가 네가 집이 어디냐고 궁금하다고 했는데, 그냥 저기 위로 쭉 올라가면 된다고 얼버무리고는 가르쳐주지 않았어. 지금 생각하면, 단칸방이 뭐라고, 옥탑방이 뭐라고 그렇게 했는지 후회가 되곤 해. 삼거리슈퍼 앞에 서면, 항상 조마조마했어. 네가 또 우리집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걱정이었지.

 그날 삼거리슈퍼 앞에서 너와 헤어지고, 혼자 털레털레 집으로 걸어왔지. 집 안에는 아버지가 방에 누워 계셨어. 일 나간 엄마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어. 아침에 학교 갈 때처럼, 그는 방에 누워 있었지. 집 안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어. 술이 깨고 있는 건지, 술이 취하고 있는 건지. 기억이 가물거려. 단지, 날선 말들이 오갔고. 그래, 날선 말들. 어쩌면 내가 먼저 그를 비난하는 말들을 쏟아 놓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아무 말을 안했을지도 몰라. 비난의 눈빛만을 쏟아놓았을지도 모르지. 그 날의 날씨도, 그 날의 옷도 또렷이 기억나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기억이 없어. 마치 필름이 끊기듯. 화가 난 그가 소리를 지르며 식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던 장면. 그를 피해 방으로 뛰어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덜덜 떨었던 장면. 창문에 비친 식칼을 든 아빠의 얼굴. 그렇게 몇 장면만 멈춰진 사진처럼 남아있어.

 다음날 너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 봤지. 무슨 이야기든 너에게 조잘거리며 털어놓던 나였는데, 그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그네만 같이 탔던 것 같아. 가장 친했던 너에게도 단칸방, 술 취한 아버지, 무서웠던 기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어. 힌트조차 주고 싶지 않았지. 뭔가 말을 시작하면, 다 쏟아져 나올 것처럼 불안했어. 내게 지긋지긋했던 것들을 너도 혐오하며 너조차 떠나가 버릴까봐 두려웠지.

 오늘. 네가 죽었다는 부고문자를 받고서, 왜 나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무슨 일이야? 괜찮아?’라고 물었던 너의 물음에 나는 이제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네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일이야? 괜찮아?’ 라고 물어보지 못했던 내가 후회스러워서 일까. 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있는 건 아닐까. 괜찮지 않은데, 괜찮냐고 묻는 건 아닐까. 머뭇거리다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말았어. 답을 들을 수 없어도 너에게 물어볼 걸. 그리고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할 수 없어도 괜찮아.’ 라고 이야기할 걸.

 

2015-11-02
발바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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